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문단 편집) == 구조 작업 == [[파일:attachment/sampoong08.jpg|width=600]] [[파일:external/thefirefighterdream.files.wordpress.com/sampungdept54.jpg|width=600]] [[마지막 생존자]] 중 한 명을 구조하는 모습.[*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ampungdept54.jpg|서울시 소방재난본부 보유 사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 [youtube(R7PeDUjcFUw)] [youtube(vp4uHDNeaWI)] [youtube(EeboNxIt1-I)] [youtube(Sz5nJmi_quM)] 안타깝게도 이런 대형사고에서 조심스럽고 효율적이어야 할 구조작업이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이제는 이런 사고에서 초기 구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붕괴 사태가 일어날 줄 미처 몰랐고, 대규모 구조작업을 체계적으로 한다는 개념 역시 부족하여 구조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후속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허점까지 많이 드러났다. 이런 대형 긴급사고에 대비한 매뉴얼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 이전에 대형긴급사고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대응체계가 후진적이었다. 사고 이후 소방서와 경찰과 인근의 [[대한민국 육군|육군]] [[수도방위사령부]] 및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부대들을 비롯하여 지역주민과 민간 자원봉사자,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전우회, 심지어는 [[주한미군]] [[미합중국 육군|육군]]까지 수많은 기관과 인원들이 사고 현장에 몰렸고, 이 와중에 소방본부와 경찰과 서울시 그리고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서로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체계적인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청와대]]가 개입해서 소방본부가 현장 지휘를 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여러 기관들과 유족들, 그리고 민간자원봉사자들 사이에 각종 불협화음이 계속해서 속출했다. 아래에 서술된 각종 앞뒤 막힌 뜨뜻미지근한 상황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구조대 인원 통제나 운영 등이 거의 주먹구구였고, 구조장비나 절단기 등 기본장비가 미리 확보하지 않아 구조가 지연되는 등 모두가 우왕좌왕하였다. 게다가 사고 당일 매몰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소방차로 불을 끄고자 하였는데, 붕괴 사고로 수도가 끊기는 바람에 주변 옥외 [[소화전]]이 작동을 하지 않아 진화 작업이 지체되기도 했다. 이후 이 불은 자동차 엔진오일과 휘발유에서 난 불로 판명되어 구조대의 잘못된 대응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진 속 구조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건물이 붕괴되면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불이 났는지 확실히 알아낼 수는 없다. 이후 실제로 붕괴된 동의 북쪽 엘리베이터 타워가 서서히 붕괴된 A동 파편 위로 기울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 때문에 안전을 위해 H빔을 설치하느라 활발했던 구조작업도 잠시 지연되었다. 매몰 52시간 만에 환경미화원 24명이 구출되었다. 화재의 열기와 소방수 때문에 생존자들의 희비도 엇갈렸다. 지하 1층에서 70여 시간 만에 구조되었다가 이송 도중 사망한 이은영은 몸에 2~4도 화상을 입고 왼쪽 눈이 파열되어 청색증에 시달린 채 발견되었고, 그 다음에 발견된 생존자인 최명석의 근처에 있던 다른 생존자들 중 한 사람은 안타깝게도 구조대원들이 뿌린 물 때문에 익사하였으며, 유지환과 박승현은 화재로 인한 열기로 초기에는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소방수 덕분에 수분을 섭취하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과 더불어 사고 당시 줄기차게 나왔던 1967년 9월에 발생했던 충남 청양의 갱도 붕괴사고에서 열엿새 만에 구출된 생존자 광부 양창신의 인터뷰가 계속 방송되었다. 인터뷰 내용은 그가 무너진 갱도 안에서 물만 마시며 16일을 버텄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소방수(水) 덕분에 11일차에 발견된 최명석이나 13일차에 발견된 유지환 씨 그리고 17일차에 발견된 박승현이 생존할 수 있었다. 소방수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당시 지하주차장까지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지하에 붕괴된 콘크리트 더미 어딘가에 있는 차량의 화재로 발생하는 연기를 소화하기 위한 목적과 매몰자들의 생존을 위한 식수, 그리고 당시 여름의 더위로 인해 혹시나 있을 생존자의 탈진을 막기 위한 온도 조절용으로 사용되었다. 단순히 철거 시 발생한 먼지를 줄이겠다고 소방수를 뿌리지는 않았다. 당시 지하 3층 구조물까지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철거작업을 하겠다고 사람이나 장비를 집어넣지는 않았다. 모든 작업은 구조 위주였고, 철거작업은 그 와중에서 행한 부수적 결과일 뿐이었다. 당시 이러한 논쟁 사항 중에는 포크레인 투입 여부도 있었다. 포크레인으로 작업하다가 혹시나 있을 생존자가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굴삭기가 작동할 때 굴삭기의 삽 부근에서 구조대원들이 생존자 및 희생자의 확인도 병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명석도 굴삭기로 해체하다가 발견되었다.[* 반대로 이걸 안 하고 그냥 싹 밀어버려서 그 '불상사'가 발생한 사건이 [[루마니아]]에서 실제로 있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차우셰스쿠]] 집권기에 부쿠레슈티에 대지진이 일어났었는데, 구조작업 때문에 복구속도가 더뎌지자 차우셰스쿠 특유의 독재적 조치로써 이를 무시하고(시민들이 항의하면 진압했다) 잔해를 다 싹 밀어버리라고 지시해서 실종자가 몽땅 사망자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후 잔해 속에서 실종자들의 분해된 신체 일부분이 빈번하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당시 몇몇 구조 장비와 행위 중에는 모든 구조행위를 일시적으로 멈추고 실종자들의 삐삐 번호로 일괄적으로 전화를 해서 삐삐 소리로 생존자를 구조하려던 시도가 있기도 했다. 이를 위해 미군이 생존자 발견에 사용된다는 음파를 이용한 구조장비 스톨스(STOLS)를 하와이에서 공수했지만, 붕괴현장에선 잡다한 소음이 너무 많은 탓에 이 장비 덕분에 발견된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미세한 소리를 탐지하는 장비라 주변 환경이 최대한 조용해야 한다. 그래서 장비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구조활동을 멈춰야 하는데, 실종자 가족들이 차라리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구조활동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해서 미루다가 우여곡절 끝에 구조활동을 멈추고 탐지를 했다. 하지만 역시나 붕괴현장의 잡소리가 너무 많아서 의미 있는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방송 및 구조자 탐색을 위해서 직경 5 cm 정도 되는 시추공 탐지카메라를 다수 투입하였다. 붕괴사고 며칠 후 자원봉사자들이 지하 3층으로 내려가 생존자를 찾아봤지만 철수했고, 구조대원들은 건물 붕괴 위험으로 생존자 수색조차 잠정 중단했다. 사고 초기 서울시는 실종자를 200여 명으로 집계하다 결국 400여 명으로 2배 정정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정을 하였다. 붕괴사고가 단일 사고 최다 인명피해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종자 접수 하나 제대로 못하는 서울시에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더하여 팔다리가 잘려 나간 시신들이 건축 잔해물과 뒤섞여서 유가족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당국은 팔 2개+다리 2개+머리+몸통=시체 1구로 피해자 인원을 추산하여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겨우 찾아낸 시신의 팔다리가 맞지 않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자 그제야 잔해를 갖다버린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뒤져서 시신 142구를 추가로 수습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72300289118010&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7-23&officeId=00028&pageNo=18&printNo=2292&publishType=00010|#]] 사망자의 시신이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고 쓰레기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이다.[* 이러한 불상사는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반복되었다.] 이에 유가족들은 격노하여 거리 시위를 하기도 했다.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와 민간인 그리고 유가족 등 50여 명이 사비로 절단기 등을 구입해 생존자 구조에 박차를 가했으나, 현장 지휘소에서는 이들에게 철수하라고 했으며 재진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21세기에 벌어지는 사건사고들을 들여다봐도 사고 수습 과정에서 구조원들의 추가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존재한다. 메뉴얼이 확립되고 이에 대비해 충분한 훈련을 거친 사람들도 이렇게 희생되는데 이 당시 구조대원들 또한 메뉴얼이 없는 상황이라 그 대응이 심히 허술했다.] 초기에 우왕좌왕하던 구조본부도 시일이 지나며 체계를 갖추어 삼풍백화점 건너편 삼풍주유소를 구조본부로 삼고 구조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구조본부는 자원봉사자를 모두 철수시키고 전문 구조대원만으로 구조활동을 한다는 방침을 정한 뒤 전문인력으로 구성된 구조대를 구성했다. 이런 방침이 내려온 이유는 '''자원봉사를 핑계로 범죄를 일삼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일부 자원봉사자들이 봉사를 한다는 핑계로 봉사자들에게 나눠주는 물품을 취득하고 백화점 안에 있는 물건들을 무단으로 절도하는 사례가 발견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유족들에게 접근하여 시체 발굴을 이유로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까지 나온 것이다. 한두 건 정도도 아니었으며, 당시 절도 혐의로 구속된 이들의 숫자만 400여 명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모든 혐의가 들통나서 구속됐다. 이와 다르게 사회 각 계층에서는 온정이 전해졌다. 근처 군부대 장병들은 혈액이 모자란다는 소식을 듣고 헌혈을 했고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건너편 삼풍주유소는 영업을 중단하고 사무실을 통째로 서초구 재해대책본부로 내놓았으며 인근 부녀회원들이 컵라면과 빵 등을 작업자에게 배식했다. 경쟁업체 [[현대백화점]]도 직원 30~50명을 사고 현장으로 즉시 파견해 구조대원들에게 커피와 라면을 제공하면서 '비록 경쟁업체이지만 같은 백화점 업계끼리 이럴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 코미디언 [[조정현(코미디언)|조정현]]은 운영하던 뷔페 직원들과 사고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한 외국계 호텔에서도 음식을 내놓았다. 또한 용접 도구가 필요하다는 방송을 듣고 용접공 수십 명이 달려왔고, 한 업체에서는 최신식 조명 도구를 설치하여 현장을 밝혔다. 그 외에도 부상자 응급처치를 도와주기 위해 수녀들이 왔었고, 한 상인은 우의 수백 장을 자원봉사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미국]], [[러시아]], [[프랑스]]가 사고 현장에 구조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으나, 정부에서는 자체 수습이 가능하다고 판단, 이들의 제의를 사양했고 위에 나와 있듯 일부 주한미군 병력과 하와이에서 음파 탐색 장비와 함께 온 소수의 미군 지원 병력이 구조를 돕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실제로 다국적 구조대가 편성되면 명령의 주체가 흐려질 수 있으며, 의사소통이 힘들어 사망자나 체계적인 구조가 힘들어진다. 이러한 구조대는 삼풍과 같은 백화점 한 채 범위의 국지적인 재난보다는 광역적인 인재 및 자연재해와 같은 상황에서 더 효과를 발휘한다.] 사고현장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시내 병원들로 후송되었는데, 잔해에 깔리거나 늦게 발견된 시신일수록 더위 등으로 부패되어 타버리거나, 백골화가 진행되기도 하여 종전처럼 인상착의나 지문만으론 신원확보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서울교대에서 실종자 가족 150명의 혈액을 채취해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DNA 감식기법'을 시도했다.[[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0439|#]]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급격하게 붕괴한 건물에 깔린 시신들 중 상당수는 말 그대로 증발했고, 실종자들 중 아예 시신을 찾지 못하거나 시신의 일부분만 찾은 경우도 상당했다.[* 잔해에서 팔 부분만 찾아서,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로 신원을 확인한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